Text. 이소영 작가
지금 어디선가 홀로 낫을 들고 자신만의 밀을 묵묵히 베어가며 수확하고 있을 모든 사람에게 고흐의 <수확하는 사람>은 굳건한 이정표가 되어준다. 언젠가 끝나지 않을 추수도 가을이 가기 전 마무리가 되듯 말이다. 찾아지지 않는 길도,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목표도 꾸준하게 행동한다면 한 계절이 지나고 원하는 것을 내어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그 희망이 오늘을 살게 한다.
한 남자가 드넓은 황금 들판에서 오직 낫만을 들고 밀을 수확하고 있다. 과연 이 넓은 밀밭에서 홀로 일하는 그는 언제쯤 수확을 마칠 수 있을지 도통 감이 오지 않는다. 그와 대화를 해본 적도 없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그가 끝끝내 성공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아니 기필코 성공했으면 좋겠다. 어쩌면 삶에 있어 무엇인가를 수확하고 싶은 나의 욕구가 이 작품에 투영된 걸지도 모르겠다.
이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가 죽기 1년 전 남긴 작품으로 고흐가 좋아했던 노랑, 황색, 금빛, 갈색이 80%를 차지하고 있다. 그림 하단에는 주인공인 남자가 이미 수확을 진행한 볏짐들이 보이고 오른쪽 모든 공간은 앞으로 남자가 해야 할 몫이 그의 시간과 공간을 온통 뒤덮고 있다. 당시 고흐는 생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병실 철창을 통해 바라본 풍경을 주로 그렸다. 고흐는 1889년 7월에 작업을 시작했으나 의도치 않게 자주 찾아오는 발작으로 작업을 중단하다가 재개했다. 고흐는 이 정신병원에 머문 1년 남짓이라는 시간 동안 밀밭 풍경화를 열 점 넘게 완성했다. 그래서 비슷한 구도와 주제의 작품이 있는 것이다. 고흐는 늘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로 연작하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모순되게도 이 밀밭에서 자신의 삶을 종료하기 위한 권총을 겨눈다.
가을이 오고 논밭이 금빛으로 물들면 우리는 늘 그 풍경을 향해 ‘풍요롭다’고 이야기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색채 심리학에서 황갈색은 대지의 온기와 생명력, 나아가 생산력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땅이 지닌 색에서 모성적 힘을 느끼기에 고흐의 작품 속 황갈색을 보면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였다’라는 피곤한 느낌보다 ‘건강하고 생산성 있게 해낼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고흐는 스스로 귀를 자르는 기행을 보여주기도 했고, 말년에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자기 자신의 치료를 위해 정신병원에서 지내기도 했다. 반면 모두가 고흐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그에게는 감정보다는 이성이, 능력보다는 성실함이 꽤 많은 삶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고흐가 그린 <수확하는 사람>은 고흐가 스스로를 응원하기 위해 그린 작품일지 모른다. 삶에서 한 번도 미술적으로 성공을 제대로 수확해 보지 못한 사람 역시 빈센트 반 고흐였으니 말이다. 그는 매일 드넓은 미술계에 홀로 서서 벼를 베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그도 그럴 것이 고흐는 이 시리즈를 그리면서 동생 테오에게 이런 편지를 남겼다.
‘자신의 직무를 완수하려는 악마처럼 싸운다’는 표현을 통해 나는 고흐의 삶이 많은 사람을 향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의 의미를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흐는 가난했고, 생전에 그림을 많이 팔지도 못했고, 친구도 많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밀밭에서 우직하게 예술적 길을 향해 나아갔다. 그것이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였다. 그 결과 시간이 흘러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미학적 수확을 일궈냈다. 물론 생전에 알려졌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소통하는 그림연구소, 조이뮤지엄 대표. <그림은 위로다>, <미술에게 말을 걸다>, <서랍에서 꺼낸 미술관>, <처음 만나는 아트 컬렉팅>, <칼 라르손, 오늘도 행복을 그리는 이유> 등 다수의 책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