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이소영
2월에서 3월로 달력의 앞 숫자가 바뀔 때쯤이면 나는 제일 먼저 옷장을 살핀다. 겨우내 입었던 무채색의 코트를 넣어두고, 조금 더 밝은색의 외투를 고르고 싶어서다. 3월, 봄이 된다 한들 온도가 급격하게 따뜻해지는 것도 아니지만, 신기하게도 봄을 시작하는 시간의 문턱은 많은 사람들에게 ‘색’을 고르는 고민과 기쁨을 안겨준다.
Vase of Flowers in a Garden, 1910, oil, canvas. Private Collection
글로벌 컬러 전문 기업 ‘Coloro’는 2023년 전 세계적인 유행을 주도할 컬러로 ‘디지털 라벤더’를 선정했다. 라벤더는 앙리 마르탱(Henri Jean Guillaum Martin)의 그림 속에서도 볼 수 있는 옅은 보랏빛의 컬러다.
흔히 보랏빛은 ‘웰빙’과 ‘현실도피’를 상징하는데, 정신 건강에 대한 현대인의 지속적인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가상 세계나 새로운 세계로의 도피를 꿈꾸기 때문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실제 라벤더와 같이 파장이 짧은 색상은 차분함과 평온함을 불러일으키며 상상력을 자아낸다.
하지만 보라색은 의외로 자연에서 빠르게 찾기가 쉽지 않다. 흙은 누런빛, 숯은 검정빛, 하늘과 바다는 푸른빛, 나뭇잎은 초록빛, 생명체의 피는 붉은빛이다. 보라색은 라벤더나 팬지꽃, 나팔꽃처럼 피기를 기다려야 하는 인고의 시간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옛날부터 보라를 ‘신비의 색, 보석의 색’이라고 표현한다거나, 신비스러운 ‘예술가의 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시대 사람들은 ‘디지털 라벤더’라는 색상 이름을 상상도 못했을 테지만.
Sewing Scene under the Pergola at Marquyarol, 1902, oil, canvas. Private Collection
앙리 마르탱은 당대 활동한 많은 인상주의 화가 치고는 우리에게 낯설다. 아무래도 인상주의 화가들 중에서는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이 익숙할 테다. 기법 역시 인상주의보다는 분할주의, 즉 점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신인상주의 화가들에 가깝다(분할주의는 물감을 팔레트에서 혼합하지 않고 캔버스에 바로 찍어 바르는 기법으로 혼색을 쓰지 않기에 멀리서 작품을 보면 더욱 선명하게 각인된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사진기의 보급은 당시 화가들의 미래를 위협했다. 이에 많은 젊은 작가들은 ‘내 눈에 보이는 빛과 그림자를 화폭에 진실하게 표현하자’로 한계를 뛰어넘었다. 앙리 마르탱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는 인상주의 선배 화가들보다 성실하고 정확한 점묘법을 통해 대상을 포착하고 싶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빛을 직접 그리는 것, 그것이 인상파들이 도전한 과제였다. 그래서 인상파를 좋아했던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미술 비평가였던 에드몽 뒤랑티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인상파는 거의 언제나 보라색과 파란색 계통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당시 화가들의 그림에는 그림자가 보랏빛으로 표현된 작품들이 많다. 위쪽 작품 역시 세 명의 여성이 따뜻한 오후에 바느질을 하며 대화를 하고 있지만, 그림자는 모두 보랏빛으로 표현되었다.
Madame Henri Martin under the Oleander of Marquyarol, 연도 미상, oil, canvas. Private Collection
19세기 후반 파리에서 활동하는 많은 남성 화가들이 여러 여성들과 스캔들이 나고, 본인의 부인을 두고도 많은 사랑을 탐닉했지만, 앙리 마르탱은 한 여인과 50년을 살았다. 그래서일까 앙리 마르탱은 한국에서 여성 팬이 많은 듯하다. 그는 모자가게에서 일하던 ‘마리’라는 한 여성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져 모자가게 옆 작은 방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마리 역시 수익이 일정하지 않은 화가인 남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꾸준히 일을 했다. 마르탱은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을 그림으로 많이 남겼다. 1895년 마르탱은 파리 시청사의 장식화를 그리며 명성을 쌓아갔고, 말년에는 프랑스 정부에서 주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을 정도로 인정을 받는다.
앙리 마르탱의 작품을 볼 때마다 무수히 많은 촘촘한 점들이 그의 인생과 사랑을 닮아 성실하다고 생각해왔다. 충실하게 한 점, 한 점 찍어가며 완성한 마르탱의 그림처럼 올봄을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성근하게 채우고 싶다.
소통하는 그림연구소, 조이뮤지엄 대표. <그림은 위로다>, <미술에게 말을 걸다>, <서랍에서 꺼낸 미술관>, <처음 만나는 아트 컬렉팅>, <칼 라르손, 오늘도 행복을 그리는 이유> 등 다수의 책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