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강진우 문화칼럼니스트 Photo. 넷플릭스 <나의 문어 선생님>
야생 동물과의 교감은 쉽지 않다. 그 대상이 바닷속 바위틈에 웅크리고 있는 문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묵묵한 기다림 끝에 문어의 유연한 다리가 손에 닿은 그 순간, 절망에 빠졌던 한 사람의 인생이 밝게 빛나기 시작한다.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의 주인공 크레이그 포스터의 이야기다.
20년 가까이 전 세계를 무대로 다큐멘터리를 촬영해 온 크레이그 포스터는 한순간 자신을 덮친 거대한 번아웃과 슬럼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토록 좋아하며 파고들던 영상 촬영과 편집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고, 예전 같은 힘찬 일상과 가족과의 오붓한 시간도 어려운 일이 돼 버렸다.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어릴 적 많은 시간을 보내며 행복한 추억을 쌓았던 대서양 앞바다로 나아갔다.
오랜만에 만난 신비로운 대자연은 그에게 활력을 불어넣었다. 경이로운 광경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몇 날 며칠 바닷속을 드나들던 중 조개껍질로 둘러싸인 둥그런 물체가 카메라에 잡혔다. 정체가 궁금해 잠시 관찰하던 찰나, 물체 안에서 문어 한 마리가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천적을 피하기 위한 문어의 은신술이었던 것. 크레이그 포스터와 문어는 그렇게 첫만남을 가졌다.
이후 크레이그는 묘한 끌림을 에너지 삼아 매일 같이 문어의 활동 영역을 찾았다. 26일째 되던 날,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문어가 조심스레 그에게 손을 뻗자 크레이그도 기꺼이 문어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켈란젤로의 명화 <천지창조>가 절로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바로 이때부터 사람과 야생 문어의 보기 드문 교감이 시작됐으니, 크레이그와 문어, 시청자들에게 이 순간은 그야말로 천지창조의 순간과 다름없었다.
크레이그는 이 황홀한 만남을 1년 가까이 이어 나간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놀라 도망간 문어를 찾기 위해 문어에 대해 공부한 뒤 마침내 다시 찾아내는가 하면, 밤 수영을 감행하며 사냥 모습을 포착한다. 상어와의 혈투 끝에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간 문어가 새 팔을 돋우며 삶을 이어 나가는 모습에서 고비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희망을 발견하고, 상어의 2차 습격을 받던 중 상어의 등에 올라타는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하는 문어의 모습을 지켜보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름조차 붙이지 않은 이 ‘암컷 문어’는 어느새 크레이그의 인생 스승으로 거듭나 있었다.
문어와의 만남은 크레이그에게 자연과 생태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문어를 중심으로 한 해초 숲의 생태계에 대해 탐구하며 마주친 수많은 야생동물의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새삼 자연의 신비와 소중함을 깨달은 것. 그럴수록 문어에 대한 애정과 감정이입이 강해졌지만, 크레이그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암컷 문어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지켜본다.
문어를 만난 지 324일째 되던 날, 크레이그는 암컷 문어의 은신처에 또 한 마리의 문어가 있는 모습을 포착한다. 함께 후대를 이을 짝을 찾은 것. 좀처럼 볼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이었지만, 크레이그는 문득 두려워졌다. 문어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문어는 먹지도, 움직이지도 않으며 알을 품었고, 덕분에 수만 마리의 새끼가 무사히 태어나 바다 각지로 흩어진다.
다음날 새벽, 기력을 소진한 문어가 해류에 떠밀려 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바다의 청소부 역할을 하는 물고기들이 문어의 살점을 하나둘 떼어 먹었고, 마침내 상어가 나타나 문어를 물고 사라졌다. 크레이그는 눈물을 쏟는 와중에도 희박한 확률을 뚫고 생애 주기를 완성한 암컷 문어에게 경의를 표하며 작별 인사를 건넨다. 몇 개월 뒤, 마치 인사라도 하듯 바다 수영을 즐기는 그와 아들에게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문어 새끼가 찾아온다. 암컷 문어가 남긴 새로운 삶이 이제 막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암컷 문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인간도 자연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을 갖게 된 크레이그는 이후 잠수부 단체 ‘Sea Change Project’를 공동 설립, 문어와 함께 유영한 해초 숲 보호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크레이그의, 아니, 우리 모두의 문어 선생님이 남긴 마지막 가르침은 이렇듯 전 세계 곳곳에서 살아 숨 쉬며 인간과 자연의 공존과 상생에 힘을 보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