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마저 걸음을 늦추는 느림보 섬
- 전남 신안군
‘천사의 섬’ 전라남도 신안군. 이곳의 수많은 섬 중 ‘빨리빨리’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느려도 괜찮아”라며 위로를 전하는 곳이 있다. 2007년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된 것을 비롯해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람사르 습지 목록에 이름을 올린 청정한 섬. 700년 전 송・원 시대 유물이 발견되며 ‘보물섬’이라 불리는 섬. 느린 삶을 기꺼이 감수하며 살아온 주민들도 섬을 보물로 만드는 데 힘을 보탠 곳, 바로 신안군 증도다.
느려도 너무 느렸던 외딴 섬의 삶
내비게이션에 ‘증도’를 목적지로 입력하고 서울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해 군산~부안~고창~영광~함평을 거쳐 북무안IC로 빠져나온다. 1,004개의 섬이 있어 흔히 ‘천사의 섬’으로 불리는 전남 신안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그제야 진주를 흩뿌린 듯 눈부신 바다가 시선에 들어온다. 하지만 증도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길게 이어진다. 도로 위 표지판이 무안군을 벗어나 신안군 지도읍에 들어선 것을 알리지만, 솔섬을 시작으로 하탑도, 원달도, 사옥도까지 거쳐야 비로소 증도에 닿을 수 있다.
“열일곱에 시집 오며 증도로 들어왔어요. 친정이 사옥도라 시방이야 넘어지면 코 닿을 만크롬 가찹지만, 그때는 발길이 쉬 떨어지지 않대요. 자식 생기니 더하고 말이죠. 지금처럼 다리 생겼으면 엄매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봤을 것을…”
증도면사무소 인근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김오식 할머니(68세)는 차로 10분이면 도착하는 사옥도가 고향이다. 지금이야 2010년에 개통한 증도대교가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반세기 전에는 그리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동트기 전에 일어나 하루하루 무던히도 열심히 살았지만, 증도의 삶은 느려도 너무 느렸다.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지정된 섬
세상과 단절되었던 외딴 섬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것은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된 2007년부터이다. 슬로시티는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전통문화와 자연을 잘 보호하면서 자유로운 옛 농경시대로 돌아가자’라는 의미로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국제운동이다. 그런 의미라면 증도야말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증도에는 억겁의 세월을 거치며 바다가 빚은 갯벌이 있고, 그곳에서 짱뚱어, 망둥어, 칠게, 농게 등 수많은 생물이 살아간다. 신안군은 이러한 지역 특성을 살려 솔무등공원에서 우전해변까지 갯벌을 가로지르는 470m 길이의 다리를 놓았다. 이름도 정겨운 짱뚱어다리. 청정 갯벌에서만 사는 짱뚱어를 가깝게 살피며 걸을 수 있는 다리라는 의미가 담겼다. 썰물 때면 질퍽한 갯벌 위에서 뛰노는 짱뚱어와 칠게를 관찰하고, 밀물 때는 바다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어 증도의 명물로 언급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증도는 우전도, 앞시리섬, 뒷시리섬 등 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다 앞시리섬과 우전도 사이 바다를 막아 농경지를 만들었고, 합쳐진 섬을 ‘전증도’라 불렀다. 뒷시리섬은 자연스레 ‘후증도’가 되었다.
전증도와 후증도가 이어져 지금의 증도가 된 것은 1953년. 한국전쟁 직후 피난민 구제와 국내 소금 생산 증대를 목적으로 두 섬 사이를 막아 염전을 조성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염전이 약 460만㎡ 크기로 여의도 면적 두 배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태평염전이다. 청정한 바다와 그 위를 부지런히 달려온 바람, 맑은 하늘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햇빛이 힘을 모아 바다의 정수인 소금 결정을 만든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의 약 6%가 이곳에서 나온다.
증도 여행의 시작점, 태평염전
증도를 찾은 사람들이 여행의 시작점으로 삼는 곳도 태평염전이다. 지평선을 이루는 드넓은 염전, 끝이 보이지 않도록 길게 이어진 소금창고, 소금과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두루 살필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소금박물관, 염전에 들어가 직접 고무래로 대파질하며 소금 만드는 과정을 겪어보는 염전체험장 등을 한 곳에서 모두 접할 수 있다. 태평염전과 과거 소금창고로 사용되었던 소금박물관은 각각 등록문화재 360호와 361호로 지정되었다.
소금박물관 건너 야트막한 야산 정상의 소금밭 낙조 전망대에 오르면 이러한 태평염전의 모습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칠면초와 함초가 갯벌을 붉게 물들이고, 하얀색 삐비꽃이 바람에 맞춰 정겨운 춤사위를 펼치는 염생식물원도 증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
증도가 슬로시티로 지정될 무렵 조성된 한국지역난방공사의 태양광 발전소도 지척이다. 강우량이 적고 일조량이 풍부한 염전지대이기에 태양광 발전 단지로는 최적의 조건이었을 것이다. 소금밭 낙조전망대를 거쳐 태평염전 3공구 방향으로 내려오면 해가 뜨는 동쪽으로 56,000㎡ 부지에 5,000장 가깝게 설치된 태양광 모듈이 눈에 들어온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염전과 드넓은 갯벌을 품은 모습까지 슬로시티 증도의 아름다움을 두루 접할 수 있다.
700년 전 유물이 깨어난 보물섬
증도의 별칭인 ‘보물섬’과 관련된 일화도 재미있다. 옛날 증도의 강아지들은 귀한 도자기를 밥그릇으로 사용할 정도였다. 그만큼 증도 부근 해역에서는 어부들의 고기잡이 그물에 보물이 딸려 나왔다고. 그러다 1975년 8월 증도 북서쪽 해역에서 조업하던 어부의 그물에도 도자기 6점이 딸려 나왔다. 어부가 그 보물을 신고하면서 600년 동안 바닷속에서 잠들어 있던 송・원 시대 유물 2만 3,000여 점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엽전만 28톤에 이르는 실로 방대한 양이었다. 이후 유물이 발굴된 해역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74호로 지정되었고, 해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이를 알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섬과 섬을 연결하는 연도교가 놓이며 뭍으로 길이 이어졌지만, 슬로시티 증도는 여전히 여행의 속도를 늦춰야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척박한 인생을 오로지 소금 생산에 바친 염부와 섬 생활에서 소소한 행복을 가꾸던 주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애환이 깃든 증도의 아름다움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앞서 언급했듯이 증도는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람사르 습지 등에 지정되며 글로벌 3관왕에 오른 청정한 지역이다. 뿐만 아니라 전라남도는 갯벌도립공원으로, 해양수산부는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하며 자연이 준 선물을 온전하게 관리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증도가 이렇듯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의외로 단순하지 않을까. 느렸지만 아름다웠고, 느렸기에 아름다울 수 있었다고 말이다.
숙박 : 증도민박협의회가 운영하는 웹사이트(www.j-minbak.com)에는 주민들이 운영하는 숙소가 마을별, 가옥형태별, 객실 형태별, 객실수별, 최대 정원별로 잘 정리되어 있다. 웹사이트에 게재된 전화로 문의해도 객실을 연결해 준다.
맛집 : 된장의 구수한 맛에 증도 바다 특유의 내음이 곁들어진 짱뚱어탕을 맛보자. 갯마을식당(061-271-7528), 안성식당(061-271-7998), 고향식당(061-271-7533), 증도밥상(061-261-2226)은 짱뚱어탕을 잘하는 향토음식점이다.
글/사진 김용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