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윤진아 Photo. 정우철
손잡고 걷는 삼대(三代) 위로 가지런히 태양이 깃든다. 풍요의 바다에서 시인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떠올릴 사람이 있다는 게 행복 아닌가. 조영수 주임 가족이 태안 앞바다에서 길어 올린 오늘치 행복을 카메라에 담았다.
왼쪽부터 조영수 주임, 할머니 김갑임 씨, 어머니 이미향 씨, 할아버지 이철재 씨, 형 조영재 씨
오랜만에 활기를 찾은 백사장 가득 보드라운 모래알들이 소란하게 반짝인다. 청포대 해수욕장 끄트머리에 앉아 달달한 바닷바람을 움켜쥐며 가을 소풍이 시작됐다. “어릴 땐 전국 방방곡곡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여행을 자주 다녔어요. 서해에선 갯벌체험을 많이 했는데, 조개 캐는 게 보물찾기처럼 재미있었어요. 해질 때까지 조개를 한아름 잡아와 온 가족이 맛있게 요리해 먹었죠. 오늘 모처럼 옛 추억을 곱씹으며 실력을 발휘할 생각이에요. 내일 아침 메뉴는 조개탕으로 이미 정해놨습니다. 하하!”
눈부시게 자란 손자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할머니가 촬영 내내 박수까지 치며 “아이고, 이쁘다~” 감탄사를 쏟아낸다. 바다를 꼭 닮은 파란 재킷에 하늘색 모자로 멋을 낸 할머니 김갑임 씨는 “오늘 할머니가 제일 예쁘다”는 손자들의 칭찬에 손사래를 치면서도 “이쁘면 사진 많이 찍고, 이다음에 나 죽은 다음에 두고두고 봐라~”라며 더 멋진 작품을 남기는 데 의욕을 보였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이 퇴근할 때까지 형제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당신들의 자식을 키우던 바쁜 시절엔 아마도 가능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애지중지 돌봐주셨던 눅진한 사랑을 이제는 절절히 느낄 수 있다. “할머니는 제가 아프면 약을 지어주시고, 친구가 괴롭히면 손잡고 찾아가 혼내주시고, 어떤 문제가 생기든 척척 해결해주셨죠. 가끔 할머니랑 집 앞 공원에 은행을 주우러 나갔는데, 고약한 냄새를 참으며 바구니 가득 담아왔던 기억이 나요. 천식에 좋다며 할머니가 노릇노릇 구워주신 은행은 정말 고소하고 맛있었죠.”
무뚝뚝한 표정으로 손주들의 원성을 받던 할아버지 이철재 씨가 할머니의 약진에 자극받았는지 기습 손하트를 날려 웃음꽃을 피워냈다. 6·25 참전용사였던 할아버지는 손자의 육군 훈련소 수료식 때 조영수 주임의 가슴에 직접 이등병 계급표를 달아주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오늘처럼 활짝 웃는 모습은 처음 본 것 같아요. 아흔을 훌쩍 넘은 연세에도 매일 아침 운동을 거르지 않으시는 할아버지는 늘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셨죠.”
움푹 팬 모래구덩이에 중심을 잃고 넘어지거나 조개껍데기에 속절없이 발을 베어도, 어린 날 걸음마를 일러주셨듯 담담하게 다시 균형 잡는 법을 알려주실 거라는 믿음. 백사장은 길이면서 쉼터도 된다. 다 큰 형제가 때아닌 술래잡기로 질주의 쾌감을 만끽할 수도 있고, 털썩 앉아 모래놀이의 추억을 되새길 수도 있다. 다섯 살 터울의 형 조영재 씨는 한국남동발전에서 일하고 있다. 여느 형제들이 그렇듯 성장기엔 같이 있기만 해도 티격태격 싸우던 ‘원수지간’이었지만, 사실 조영수 주임에게 형은 등대이자 거울 같은 존재라고 했다. “사춘기 때 형을 보러 삼천포 화력발전소에 간 적이 있어요. 압도적인 규모의 발전소 중앙제어실에서 일하는 형이 처음으로 멋있어보였죠. 그때부터 제게도 목표라는 게 생겼고, 인생이 완전히 바뀐 것 같아요. 형은 제가 바라는 ‘5년 뒤의 이상적인 내 모습’이에요, 언제나요.”
훌쩍 자란 두 아들의 손을 잡고 해변을 거니는 어머니의 표정이 꽃처럼 환하다. 교단에서 내려와 사회봉사로 바쁜 일과를 이어가고 있는 어머니 이미향 씨는 오랜만의 가족여행에 누구보다도 신난 모습으로 조영수 주임을 뿌듯하게 했다. “어릴 때 장난기가 많아서 엄마가 사진 찍어주실 때마다 항상 얄밉고 짓궂은 표정을 짓곤 했어요. 얼마 전 엄마 휴대전화 배경화면이 그 개구쟁이 사진으로 설정된 걸 보고 후회도 되고 뭉클하더라고요. 결과보다는 과정을, 물질보다는 가치를 추구하셨던 엄마의 철학은 제가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바로 서는 힘이 되어주었어요. 일에 자부심을 갖고 성실히 살아오신, 엄마 자식 일이라면 당신의 삶은 항상 뒷전이셨던 헌신적인 엄마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싶어요.”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가 차곡차곡 추억이라는 퇴적층을 만들어낸다. 아직 하루가 끝난 게 아니다. 모처럼 갯벌 체험도 원 없이 해보고, 해가 지면 어시장에도 나가 싱싱한 회 맛도 만끽할 계획이다. 그 전에 우선,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햇살과 바람을 천천히 음미해야지! 철썩이는 파도 곁에서 귀를 조금 더 기울이고 엄마의 웃음소리를 들어본다. 가을볕 아래 눈을 좀 더 맞추고 할머니의 주름살을 바라본다. 지금, 여기의 행복을 미루지 않고 함께할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순간, 조영수 주임의 마음이 좀 더 단단해졌는지도 모르겠다.
5㎞의 광활한 백사장과 할배바위, 할매바위가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광을 자랑한다. 썰물 땐 두 바위가 한 몸인 듯 모래톱으로 연결된다. 서해안 3대 낙조(落照)로 꼽히는 일몰도 장관으로, 해가 지기 시작하면 바닷가 주변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든다.
만대항에서 백화산까지 이어지는 총 5개 코스의 솔향기길은 피톤치드 가득한 솔향과 짭조름한 바다냄새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도보 중심 길’이다. 해식동굴을 비롯해 SNS 명소로 알려진 용난굴(1코스), 구멍바위(2코스) 등 자연이 빚어낸 신비한 풍경을 연이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