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것? 힙한 것!
- 중고거래 시장의 이유 있는 전성기
중고는 누군가 썼던 물건이라는 의미에서 부정적 인식이 강했다.
새것을 강박적으로 추종하던 시대의 이야기다. 하지만 최근 중고의
의미는 합리적이고 나아가 힙한 것이라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다.
중고거래 시장이 뜨거워진 이유다.
“당근!”, “번개!”하게 된 중고거래 시장
“당근!”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알림음 소리에 스마트폰을 열어보면 자신
이 키워드로 등록한 상품이 올라와 있다. 상품이미지와 함께 가격, 상품
설명을 훑어보고 마음에 들면 채팅으로 거래 의사를 밝힌다. 거래 장소
는 그리 멀지 않다. 애초 GPS 기반으로 근거리 안에 있는 이들만 서로 이
어주기 때문이다. 채팅으로 정한 가까운 장소와 시간에 만나 물건을 확
인하고 돈을 지불하면 거래는 간단히 끝난다. 이것이 현재 불황과 저성
장에다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오히려 급성장한 중고거래 시장의 최강
자 당근마켓의 거래 방식이다.
물론 이전에도 인터넷 상의 중고거래 장터는 존재했지만 당시에는 전문
판매자가 매입해 재판매하거나 위탁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당근마켓 같은 중고거래 앱이 등장하면서 소비자들끼리 거래하는 P2P 방식의 중고거래 시장이 열렸다.
2015년 7월 출시된 당근마켓 앱은 2018년에 월간 활성이용자수(MAU) 100만 명을 넘어섰고, 올해 코로
나19 시국을 맞으면서 급성장했다. 2년 사이 이용자가 10배로 늘어 1,000만 명을 넘어선 것. 국내에서 월
간 활성이용자수가 1,000만 명을 넘어선 서비스는 네이버, 카카오, 쿠팡, 배달의 민족 정도라는 걸 감안하
면 중고거래 시장이 얼마나 커졌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소비자 편의를 고려해 진화하는 중고거래 서비스
당근마켓과 중고거래 시장에서 양강 구도를 이루고 있는 번개장터 역시 올해 1월에서 8월까지의 거래액만
두고 봐도 전년 동기 대비 21%의 성장세를 이뤘고, 연내 총 거래액 기준으로 1조 3,000억 원 돌파를 예상하
고 있다고 한다. 당근마켓과는 달리 MZ세대들을 겨냥한 명품이나 한정판 상품 같은 소장가치가 높은 물건
들이 많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래서 MZ세대의 가입 비중이 80%를 넘는다. 이들 중에는 단지 사용하기
위한 중고거래가 아니라 재테크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품절된 한정판이나 급매물을 사서
되파는 방식으로 차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직접 대면을 하는 걸 꺼리게 되는 이용자들을 위한 비대면 중고거래 서비스도 등장했다. 파라바라
가 그것이다. 파라바라는 대학교, 영화관, 대형 몰, 대기업 본사, 스포츠센터 등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투명
파라박스를 설치함으로써 비대면 중고거래를 가능하게 했다. 즉 사용자가 박스에 팔고 싶은 물건을 넣고 가
격과 휴대폰 번호 등을 입력하고 잠가놓으면, 구매자가 박스로 직접 물건을 살핀 후 정보를 확인하고 현장에
서 카드 결제로 구매해 물건을 가져갈 수 있게 한 것. 중고거래 시장은 이처럼 점점 소비자들의 편의성을 생
각하는 진화된 서비스로 무장함으로써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사실 중고거래는 구매자 입장에서 새 상품보다 저렴하게 물건을 구입할 수 있고, 판매자 입장에서는 사용
하지 않는 물건을 팔아 수익을 남길 수 있다는 양자의 이익에 기반한 사업이다. 여기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중고상품에 대한 인식이다. 과거 중고에 대한 이미지는 오래된 것, 누군가 사용했던 것으로서 가격이
저렴하다는 걸 빼놓고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다.
이런 인식은 경제 성장기에 오래된 것을 낙후된 것으로 여기고, ‘새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비
롯된 인식이다. 옛길을 밀어내고 신작로를 깔고, 오래된 집들을 도시 미관을 해친다며 개발하던 시대에는
오래된 것에 대한 ‘빈티지’ 개념 자체가 없었다.
이러한 ‘압축성장’의 끝에서 최근 떠오르고 있는 빈티지 개념들은 오래된 것에 시간의 가치를 부여하기 시
작했다. 옛길들이 다시 주목받고, 조금 낡은 듯 보이는 것들이 힙한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중고물품
에 대한 개념 역시 이런 인식 변화에 따라 달라졌다. 이제 젊은 세대들 또한 오래된 물건 속에서 남들이 찾
지 못하는 가치를 찾아내는 일에 열광하고 있다.
한편, 중고물품을 사용한다는 건 환경문제를 야기했던 무한정 쓰고 버리던 시대의 소비 행태와는 다른 친 환경적이고 스마트한 소비의 의미를 갖게 됐다. 이러한 윤리적 소비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자신을 표현하 는 개성으로까지 받아들여진다. 뉴트로로 대변되는 신(新)복고 열풍은 보다 힙하고 새로운 걸 찾는 젊은 세대들이 빈티지를 찾게 되면서 생겨난 것으로, 중고거래 열풍 역시 이 흐름에 영향을 받았다.
물품에 대한 달라진 인식은 최근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에도 등장하고 있다. JTBC <유랑마켓>은 연예인들
의 집안에 잠들어 있는 물건을 꺼내 직거래를 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으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
고물품의 가치를 되새겨준 바 있다. 또 MBC <나혼자산다>에 출연 중인 박나래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지
만 사용하지는 않는 물건들을 파는 중고장터를 열기도 했다. tvN <신박한 정리>는 의뢰인의 집 정리를 콘
셉트로 하고 있지만, 소유보다는 공유의 가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달라진 물품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이처럼 방송이 포착하는 중고물품에 대한 시선은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올해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는 중고거래 시장에는 오히려 호재로 작용했다. 어려워진 경제상황은 중
고물품을 통한 합리적인 소비를 더욱 이끌어냈고,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상화로 인해 요구되는 비대면 문
화 역시 지역 기반 앱을 통한 중고거래를 더욱 활성화시켰다. 많은 소비자들이 한 공간에 몰려 쇼핑하던
코로나19 이전의 소비방식들은 기피될 수밖에 없었다. 지역으로 분산되어 심지어 1대1로 이뤄지는 중고거
래는 코로나19 시대 소비자들의 안전한 대안으로 다가왔다.
경제적인데다 가치도 있고 심지어 재미까지 장착한 중고거래 시장의 전성기는, 코로나19로 인해 가속도
가 붙은 측면이 있지만, 어쩌면 한정된 자원을 가진 우리들에게 ‘지속가능한 소비’로 이끄는 어쩌면 예정된
미래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거래의 안전성 측면에서 남은 숙제들이 존재하지만 이런 점들을 보완해간다
면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도 중고거래 시장의 상승세는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글 정덕현(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