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스마트네이션
현존하는 가장 앞선 스마트시티는 어디일까. 대다수 전문가들은 싱가포르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실제로 싱가포르는 스위스국제경영개발원(IMD)이 발표한 스마트시티 인덱스에서 지난 2019년과 2020년 연속으로 전 세계 102개 스마트시티 중 1위에 올랐을 만큼 선도적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아시아의 작은 섬나라가 이처럼 세계 주요 도시들이 벤치마킹하는 스마트시티의 끝판왕으로 진화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디지털 뉴딜의 선구자, 싱가포르
싱가포르의 국토는 서울시보다 조금 큰 719㎢에 불과하다. 내로라할 천연자원도, 풍부한 인적자원도 보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서양을 잇는 교통 요충지라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자유무역 시대의 항공·해상물류 허브이자 금융 중심지로서 번성을 누렸다.
여기까지는 많이 알려진 부분이다. 하지만 싱가포르가 그 어떤 국가보다 앞서 스마트시티로의 전환을 추진했고, 현재 세계 최고의 스마트시티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싱가포르의 혁신적 진화를 가능케 한 중심에는 지난 2014년 리셴룽 총리가 선포한 국책프로젝트 ‘스마트네이션(Smart Nation) 이니셔티브’가 있다. 명칭에서 드러나듯 이 프로젝트는 하나의 도시가 아닌 국가 전체의 스마트화를 표방한다. 오는 2030년까지 모든 국가 인프라에 첨단 정보통신기술(ICT)을 접목해 지구상에서 가장 스마트한 국가를 완성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다. 도심 과밀화에 따른 에너지·교통·환경·의료·복지·안전 등 무수한 도시문제를 해결하고, 지속가능한 국가발전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싱가포르형 ‘디지털 뉴딜’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정부와 기업, 시민의 3각 편대
도시국가 싱가포르가 유토피아와 같은 야심찬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80년대부터 전자정부, 금융 등의 분야에 IT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쌓아온 자신감이 있었다.
이후 싱가포르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각 분야의 스마트네이션 정책을 체계적으로 수립하고 추진할 전문 정부조직을 정부조직을 구축, ‘경제적 기회 창출’과 함께 ‘시민 삶의 개선’을 프로젝트의 지향점으로 삼았다. 시민이 변화를 체감해야만 기업의 자발적 참여 속에 유망 인재와 스타트업 육성, 혁신기술 개발, 상용화라는 스마트네이션 선순환 체계가 구축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렇게 스마트네이션·디지털정부그룹(SNDGG), 스마트네이션·디지털정부실(SNDGO), 정부기술청(GovTech) 등이 출범했다. 또한 민관협력을 바탕으로 매년 10억 달러(약 1조 1,200억 원) 규모의 정부자금이 각 분야에 투자되고 있다.
스마트네이션 자체가 국가 전체를 디지털화하는 대형 프로젝트인 만큼 관련 세부 프로젝트를 일일이 열거하기는 어렵다. 인공지능(AI)·가상현실(VR)·증강현실(AR)·사물인터넷(IoT)·클라우드·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의 중추기술을 활용한 수십 개 이상의 프로젝트가 실행되고 있다.
3D 모델링으로 구축한 지속가능한 에코타운
주목할 만한 기술이 있는데, 바로 ‘버추얼 싱가포르(Virtual Singapore)’다. 도시를 통째로 3D 모델링해 디지털 플랫폼 속에 넣은 디지털 트윈 시뮬레이터다. 약 1,000억 원을 들여 지난 2018년 완성된 버추얼 싱가포르에는 싱가포르의 빌딩, 주택, 공원, 호수, 도로 등 모든 건축물은 물론 가로수 한그루, 벤치 하나까지 정확히 3D로 모델링 되어 있다.
싱가포르의 첫 에코타운으로 꼽히는 풍골(Punggol eco-city)은 이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풍골은 인공하천을 중심으로 자연 친화적 스마트시티를 모방하며 신재생에너지를 활용해 전력 대부분을 태양에너지로부터 공급받고, 빗물을 재활용하는 등 에코타운다운 면모를 갖췄다. 건축물을 지을 때에는 태양광을 활용해 청정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싱가포르는 풍골에 이어 녹지와 스마트 기술이 조화된 텐가 생태마을도 건설 계획 중이다. 이는 정부가 건설하는 24번째 공공주택으로, 친환경 스마트 뉴타운의 일환이다.
또한 2050년까지 태양에너지에 대해 합리적인 가격/자체 생산/환경보호의 목표를 가지고 개발정책을 진행 중이다. 현재 싱가포르의 최대 관광지인 가든스 바이 더 베이(Gardens by the Bay)도 낮에 받은 태양에너지와 빗물을 활용해 라이트 쇼를 선보이고 있다.
세계 최초의 자율주행 버스 상용화
또 다른 스마트네이션의 핵심 성과는 모빌리티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궁극의 미래자동차로 불리는 자율주행차가 바로 그것이다. 다른 국가들이 안전성을 우려하고 있을 때 싱가포르는 일반 도로의 10%를 자율주행차 실증을 위해 개방하며 테스트베드*를 자처했다. 덕분에 지난 2016년 8월 미국 누토노미와 세계 최초의 자율주행 택시를 시범 서비스했고, 2019년부터 볼보와 자율주행 버스의 시범운행도 시행하고 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올해 1월에는 난양기술대(NTU)에서 개발한 자율주행 미니버스가 주롱섬과 사이언스파크2 노선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상용운행에 돌입했다. 적어도 싱가포르에서 자율주행차는 미래가 아닌 현실의 교통수단인 셈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지속적 기술·서비스 고도화를 거쳐 오는 2022년 자율주행 차량의 상용서비스 지역을 풍골, 텡아(Tengah) 등지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스마트시티는 현대 도시의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패러다임이다. 하지만 스마트시티에는 표준도, 정답도 없다. 제대로 방향성을 잡지 못한다면 첨단기술들만 덕지덕지 묻어 있을 뿐 전혀 스마트하지 않은 기형 도시가 양산될 수 있다. 이 점에서 싱가포르의 성공적 행보가 보여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도시의 주인이자 구성원인 시민을 위한 혁신만이 진정한 스마트시티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테스트베드(testbed): 과학 이론, 계산 도구, 신기술에 대해 엄격하고 투명하고 재현 가능한 테스트를 수행하기 위한 플랫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