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박영화 Photo provided. 샘터, 한영희
스무 살이 되던 1964년,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 입회했다. 이해인 수녀는 ‘넓고 어진 바다 마음으로 살고 싶다’며 ‘해인’이라는 필명으로 1970년 천주교 잡지 <소년>에 글을 기고했고,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도 펴냈다. 이후에도 위로와 사랑, 고마움에 대한 글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준 이해인 수녀. 그런 그녀를 나태주 시인은 “우리 마음 깊이 새겨져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꽃잎”이라고 말했다. 꽃잎처럼 곱디고운 이해인 수녀를 만나고 싶었다. 수도자로서 55여 년, 시인으로서 45여 년을 은총 속에 살았으니 그저 감사할 일밖에 없다는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 초록의 나무들이 싱싱한 향기를 뿜어내고 아카시아 가득한 산 숲에서 뻐꾹새가 노래하는 초여름의 어느 날.
Q
A
사실 시는 짬짬이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쓰는 것이고요. 전국 각지에서 보내오는 편지들에 답신도 보내야 하고, 읽으려고 모아둔 책도 읽어야 하고, 가끔은 약속된 방문객도 만나야 하고, 정해진 공동기도 모임에도 나가야 하고,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도 바삐 보내는 편입니다.
Q
A
솔방울 줍는 것, 조가비 줍는 것, 다양한 스티커를 이리저리 구성해서 고운 카드 만드는 것, 그리고 좋은 격언을 모으는 것,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된 여러 종류의 미담들을 오려두었다가 소개하는 것, 실제로 목격한 아름답고 따뜻한 풍경이나 사람들의 모습을 잊지 않고 적어두었다가 되새김하는 것, 인류사에 빛나는 이웃 사랑으로 별이 된 주인공들을 조금씩이나마 닮고자 애쓰는 따라쟁이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변함없는 취미로 삼고 싶습니다.
Q
A
해인글방은 수녀원 내에 있는 전시실 겸 작업실이에요. 그곳에서 글을 쓰기도 하는데, 사실 해인글방보다는 침실에서 시를 빚을 때가 더 많아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아 조용하고 아늑하니까요. 또 어떤 특정 장소가 아니라 성당이든 정원이든 생각이 날 때마다 즉석에서 메모하곤 해요. 그래서 옷 주머니에 메모지가 늘 준비되어 있지요. 해인글방에서는 글을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편입니다.
Q
A
저의 시는 사실 일상의 소임과 기도에서 건져 올린 하나의 열매이지요. 가끔은 청탁을 받고 거기에 맞추어서 쓸 때도 없진 않으나 대부분은 일기를 적듯이 그냥 떠오르는 생각들을 틈틈이 단편적으로 메모를 해 두었다가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생길 때 정식으로 다듬는 편입니다. 주제는 자연, 생활 체험, 사람이나 책과의 만남에서 교감하며 얻은 감동 등이지요. 신분의 특성상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다양하죠.
Q
A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어요. 1부는 더러 지면에 발표했으나 안 한 것이 더 많은 최근의 시들을 담았고, 2부엔 얼마 동안 경향신문에 연재했던 시 편지를, 3부엔 이런저런 기념 시와 글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4부엔 저의 일상생활을 궁금해하실 독자들을 위해 지난 1년간 메모해 둔 일기 노트의 일부를 실었습니다. 이번 책의 삽화를 ‘오리여인’이란 분이 밝고 재밌게 그려주셔서 독자들에게 더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Q
A
꽃에 대한 시나 묵상 그런 건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꽃잎에 대해 글을 썼어요. 수녀원의 벚꽃도 예쁘고, 바람에 날리는 꽃잎들이 예쁘거든요. 꽃잎을 보면서 꽃잎 하나하나가 저와 친교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고요. 제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천국에도 가져가겠다는 마음으로 쓴 것 같아요.
Q
A
여러 사람이 있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이들은 1980년대 말 교도소에서 애절한 편지들을 보내온 사형수들이 먼저 생각납니다. 또 제가 암 투병으로 아플 때 담임 선생님과 함께 위로와 감사의 글을 적어 보낸 울산 학성여고 학생들도 생각납니다. 아, 제 수필그림책 <우리 동네>를 읽고 그림편지를 보내온 초등학생들의 편지글도 잊을 수 없네요. 수많은 편지 중 아직도 잊히지 않는 글들이 있어요. “수녀님과 동시대를 살고 있어서 참 좋아요”, “수녀님은 우리의 보물이에요”, “늘 좋은 글을 읽게 해주시어 감사해요”, “아픈데도 잘 버텨줘서 고마워요”. 이 글을 읽으면 제가 오히려 힘을 얻게 되어서 고마운 마음입니다.
Q
A
마음으로 고맙지만 그래도 언어로 표현을 안 하면 전달이 안 될 때가 더 많아요. 그러니 다소 쑥스럽고 어색하게 여겨져도 의식적으로 표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수녀원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용서하십시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래야 몸에 배고, 좋은 습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A
“올해는 희수(喜壽)가 아니신지요?” 어느 독자의 문자를 받고 깜짝 놀라 뜻을 찾아보니 77세를 의미하더라고요. ‘어느새 내 나이가 그리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곤 ‘77세답게, 50년 이상을 수도원에 살아온 수녀답게 곱절로 더 기쁘게 더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했습니다. 언제 특별히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매 순간순간이 설렌다고 말하고 싶어요. ‘행복과 숨바꼭질하는 설렘의 기쁨’이 나를 가슴 뛰게 만드니 삶이 지루할 틈이 없죠.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고, 해야 할 일들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즐거운 궁리가 많아 행복한 인생 학교의 실습생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Q
A
한 번밖에 없는 삶을 긍정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칫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평생을 툴툴대다가 삶을 끝낼 수도 있어요. 죽는 순간에 ‘아유, 그러지 말걸’ 후회하잖아요. 그러지 않으려면 평소에 감사하는 연습과 사랑하는 연습을 놓치지 말고 시간을 잘 활용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Q
A
초등학교 때부터 나이팅게일과 퀴리 부인처럼 인류에 기여한 여성상에 대해 위인전으로 많이 접한 데다 거기에 언니와 어머니를 합한 상을 멘토처럼 품었다고 할 수 있어요. 여성으로서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이웃을 향한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겠구나 여겼으니까요. 어머니 태내에서부터 또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은 입장이기에 신앙을 이론이 아니라 생활로 받아들였습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는 엄마 모습을 품게 된 거죠. 그런 엄마가 안 계셨으면 수도 생활을 하기에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Q
A
힘들어도 힘내자. ‘어둡다고 불평하는 것 보다 촛불 한 개라도 켜는 것이 더 낫다’는 격언도 함께 기억하면서요. 아직은 이렇게 살아있음을 함께 기뻐하고, 함께 힘과 지혜를 모으며, 인내와 용기를 키우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옛날에 당연한 것들이 이제 당연하지 않게 됐어요. 사소하고 평범한 것에 대해 감사하고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Q
A
큰바람은 없습니다. 자연의 나이 77세가 되고 보니 제가 수도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끝까지 성실하고 겸손하게 삶의 마침표를 찍고 싶은 게 바람이라면 바람일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