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더, 웃음 : 그림의 위로

바쁜 세상 속 우리 눈의 피로감을 풀어주는
모네의 수련 속 녹색

Text. 이소영

어린 시절 새로운 공책을 사면 공책의 표지 뒷면에는 늘 옅은 녹색 빛의 사각형이 넓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이런 글귀가 있었고, 공부하다 지친 우리는 늘 이 공간을 멍하게 바라봤다. “눈의 피로감을 덜어주는 색으로 명도 8, 채도 2의 자연과 가까운 녹색이다.” 여전히 문구 브랜드 중에서는 눈의 피로감을 풀어주는 이 옅은 녹색을 한쪽에 배치하는 듯하다.

클로드 모네, <수련이 있는 연못>

옅은 녹색은 왜 눈의 피로감을 풀어줄까?

눈의 망막은 시각세포인 간상체와 추상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눈 전체에 퍼져 있는 간상체는 명암을 인식하는 역할을 하고, 수정체와 마주한 부분에 몰려있는 추상체는 색채를 인식하는 역할을 한다. 이 추상체를 자극하는 색소는 빨강, 파랑, 녹색인데 녹색은 다른 두 색에 비해 명도와 채도가 낮다. 녹색은 명암을 인식하는 간상체를 크게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추상체에 잘 인식된다는 특성이 있기에 다른 색에 비해 편하게 인식된다. 그래서 학교의 칠판도, 환자에게 신뢰감과 안심을 줘야 하는 병원 수술복도, 비상 상황 대피로를 표시하는 비상등도 녹색이다.

화가들의 그림 중 눈의 피로감을 풀어주는 옅은 녹색을 그림에서 많이 찾을 수 있는 화가로는 누가 있을까? 바로 식물을 좋아해서 ‘정원사’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클로드 모네다.

모네의 수련 속에 깃든 녹색의 행진

클로드 모네, <수련>

1883년 모네는 파리에서 70km 정도 떨어진 지베르니라는 곳에 땅을 구했다. 그는 과수원이었던 집을 개조해 본인이 원하는 집을 만들고, 죽을 때까지 약 40년간 지베르니의 정원을 가꾸며 살았다. 계절에 따라 꽃을 심고, 가꾸고 외국 서적을 구해 원예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또, 이 정원에 일본식 연못을 만들고, 다리를 만들어 마을의 강 길을 바꿔 집의 정원으로 흘러오게 했다. 그리고 본인이 만든 정원에서 <수련> 시리즈를 250점 넘게 그린다. 모네가 같은 시리즈를 이렇게 많이 창작한 이유는 동일한 소재라도 날씨나 계절, 시간에 따라 보는 이에게 다르게 느껴지고, 인식됨을 실험하고 표현하기 위해서다.

화가가 본인이 살아가는 환경을 바꾸고, 설계해 나가는 것은 작품을 위해서도, 자신의 관리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모네에게 지베르니 정원은 자신이 꿈꾸던 유토피아였고, 유토피아 덕분에 모네는 수련 연작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매일 물이 있고, 그 물을 비추는 햇빛이 있고, 물에 떠 있는 수련이 가득한 곳.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에 가본 사람은 모네가 얼마나 그 정원에 많은 열정을 쏟았는지 감탄하게 된다.

클로드 모네, <모자를 쓴 자화상>

모네는 수련 시리즈를 그릴 때 수면 위로 비친 구름과 하늘, 버드나무 가지도 울렁이게 함께 표현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의 수련 연작을 보고 추상적이라고 느낀다(실제 말년에 모네의 시력이 안 좋아졌기 때문인 것도 있다). 모네 역시 자신의 수련 시리즈가 오로지 수련만을 위해서 그리려고 했다기보다, 매 순간 연못 위에 비치고 변화하는 형상이라고 말한 바 있다.

모네가 이 수련 시리즈를 그릴 때 가장 많이 사용한 색이 ‘녹색’이다. 모네의 작품 안에는 아주 옅은 녹색부터 짙은 녹색까지 다채로운 녹색이 많다. 모네는 1918년 1차 세계대전 종전과 프랑스의 승리를 기념으로, 수련 연작을 프랑스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여전히 자연광이 들어오는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 전시실 둥근 벽 전체를 감싸고 있다.

살면서, 깨어 있는 시간 동안 우리 몸의 기관 중 가장 바쁜 부위가 바로 ‘눈’일 것이다.

세상에 자극적인 볼거리들이 점차 넘쳐나고, 동시대 미술이 제아무리 혁신을 외친다 해도 눈이 피로할 때, 내가 찾는 작품들은 결국 근대 화가들의 작품이다. 마음이 흥분되고, 이유 없이 불안한 날이면 모네의 수련 시리즈를 말없이 감상하며 모네가 평생토록 애정 했던 물과 빛 그리고 환경의 움직이는 아름다움을 느껴보자.

이소영 미술 에세이스트

소통하는 그림연구소, 조이뮤지엄 대표. <그림은 위로다>, <미술에게 말을 걸다>, <서랍에서 꺼낸 미술관>, <처음 만나는 아트 컬렉팅>, <칼 라르손, 오늘도 행복을 그리는 이유> 등 다수의 책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