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김주희 Photo.정우철 Video.최의인
오랜 세월을 버티며 우직하게 솟아오른 나무, 고유한 운명을 간직한 나무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는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그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한 그루에 아로새겨진 역사와 사람의 흔적을 찾아 나선 그에게 나무는 어떤 의미로 자리할까. 느린 호흡으로 나무와 교감하고 시간을 기록하는 일상에 대해 물었다.
Q
A
12년의 기자 생활은 보람 있고 즐거웠습니다만, 신문 기사가 온전히 ‘나의 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퇴직 후 나의 글을 써보고 싶었지요. 궁리를 한다는 생각으로 조용히 머물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마침 천리포수목원이었습니다. 당시 천리포수목원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지 않은 터라 회원이었던 친구의 도움으로 두 달 동안 머물며 나무 가까이에서 지냈습니다. 어느 겨울날 펄펄 날리는 싸락눈을 맞으며 숲길을 산책하던 중 하얀 목련을 마주했습니다. 한겨울에 핀 목련 앞에서 나무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뒤범벅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언제나 한자리에 서서 영원을 향한 꿈을 키우는 식물의 시간을 깨닫게 된 겁니다. 이 한 순간의 깨우침 이후 나무와 사람이 함께 가는 길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Q
A
처음부터 식물학에 깊이 파고들기보다 그저 오래된 나무를 찾아보고 이 나무를 누가 왜 심고 키웠을까 하는 궁금증을 하나둘 풀어보고자 했습니다. 나무가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으니, 결국은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찾아볼수록 그 나무에 담긴 뜻이 매우 의미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더 많은 나무,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고, 그 작업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Q
A
호흡이 느려졌달까요. 일간신문 기자 생활을 하면서 항상 시간에 쫓겨 살았거든요. 그에 비하면 지금 하는 일은 매우 느리게 흘러갑니다. 무엇보다 나무와 교감하기 위해서는 나무의 호흡에 맞춰야 합니다. 나무가 살아가는 속도가 워낙 느리기 때문에 이 속도에 맞추지 않으면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죠. 어떤 경우에는 한 그루의 나무 앞에서 하루 종일을 보내기도 합니다. 나무의 숨결에 내 호흡을 맞추면서 자연스럽게 일상의 속도가 느려졌어요.
Q
A
특별한 그러나 이름도, 나이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두 분의 독자가 떠오릅니다. 하루는 남자 독자가 제게 메일을 보내왔어요. “오랫동안 투병하던 아내를 하늘로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청소를 했습니다. 청소를 마치고 컴퓨터를 켜서 밀린 메일들을 정리하는데, ‘고규홍의 나무편지’가 있어서 하나둘 보았습니다. 글을 읽는 동안 아내 간병으로 지친 몸이 치유되는 듯했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내용이었지요. 또 한 독자는 치매로 요양원에 계신 친정어머니 면회를 갈 때마다 노트북을 가지고 간다더군요. 어머니에게 나무편지를 보여주는데, 어머니가 사진만 봐도 금세 만면에 미소를 띤답니다. 나무편지에는 시골 마을의 큰 나무와 꽃 사진이 많이 들어있거든요. 치매 어머니가 다른 건 다 잊었어도 어린 시절 고향의 나무와 숲을 기억한 것이지요.
Q
A
나무답사 초기인 2000년 즈음에 만났던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와 ‘의령 백곡리 감나무’입니다. 두 그루는 하마터면 마을 사람들이 베어낼 뻔했던 나무입니다.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의 경우, 여러 정보를 찾아본 후 우리나라 물푸레나무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문화재청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해달라고 신청을 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입니다. 의령 백곡리 감나무 역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감나무임을 판단했어요. 그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는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나무를 잘 알지 못하던 초기에 나름대로 나무를 잘 지켜낸 계기로 남아서 그런지 두 그루가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Q
A
만약 다시 태어날 때 어떤 나무로 태어나고 싶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감나무’를 손꼽고 싶습니다. 감나무는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나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집집마다 뒤란에 한 그루쯤은 심어둔, 너무 높이 솟거나 지나치게 넓게 퍼지지 않아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 아주 편안한 나무죠. 하지만 흔하고 편한 탓일까요. 감나무는 있어도 곁에 있는 줄 모르지요. 평소라면 존재감조차 느끼기 힘든 그 나무의 진정한 존재감은 없어진 뒤에 절실히 느껴집니다. 사는 동안, 감나무처럼 누구에게라도 부담을 주는 사람이 아니길 바랍니다. 그리고 훗날 잊히지 않는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감나무 없는 시골 마을을 떠올리기 어렵듯, 빈 자리가 느껴지는 의미 있는 사람으로 남는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Q
A
그동안 여러 권의 책을 냈는데, 대부분은 나무의 인문학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나뭇잎 수업>은 나무의 식물학적 측면에 주목했습니다. 조금 더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나무에 담긴 생명의 원리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나뭇잎 투쟁기’라는 부제는 편집자가 붙인 제목인데,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나무가 온전히 이 땅에서 살기 위해 가장 분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잎입니다. 광합성을 해서 양분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니까요.
Q
A
우리 곁에는 늘 나무가 자리합니다. 실제로 도시는 숲보다 더 많은 종류의 나무를 품고 있어요. 하나의 아파트 단지 안에도 다양한 나무들이 있죠. 나무를 찾아 멀리 떠나기 전에 가까이 있는 나무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도블록을 뚫고 솟아오른 씀바귀 꽃 한 송이가 얼마나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지를 먼저 살펴보길 추천합니다. 그래야 여행 중에 만나는 꽃과 나무의 아름다움이 더 깊게 다가올 거예요. 바쁜 하루 중 단 30초면 됩니다. 나무 곁에 멈춰 서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셔 보세요. 나는 나무가 만들어내는 산소를 들이마시고, 나무는 내가 내뱉는 이산화탄소로 광합성을 합니다. 나와 나무 사이의 순환의 원리를 느낄 수 있죠. 이 과정을 통해 세상이 더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