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박준(시인) Illust. 다나
시인.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계절 산문>의 저자. 현재 CBS 음악FM <시작하는 밤 박준입니다> 진행자.
누구나 처음 맞닥뜨리는 일 앞에서는 어느 정도의 곤란과 곤혹을 겪게 되기 마련입니다. 처음 가보는 길 위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걸음을 의심하게 되고 처음 해보는 일 앞에서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내젓다가 이내 푹 숙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누군가를 처음 만나는 일 역시 매번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어찌 보면 사람에 관한 것은 가장 난이도가 높은 ‘처음’일 수도 있겠지요.
나와 상대는 그동안 다른 시간과 장소를 살아 왔습니다. 그러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내 말투를 이상하게 느끼지는 않을지. 어렵게 꺼낸 나의 생각이 혹여 그의 평소 생각과 너무 먼 것은 아닐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일처럼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어색함을 극복하고 마음의 간격을 빠르게 극복하는 묘안을 안타깝게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너무 서두르지 않고 내가 가진 면모들을 이것저것 보여주는 수밖에요. 자연스럽게 생각과 마음을 풀어낼 수밖에요.
저는 이럴 때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날씨와 계절에 대한 이야기, 반려동물에 대한 기억, 김치찌개를 끓일 때 나만의 비법, 혹은 어렸을 때 어떤 만화를 좋아했는지, 혹은 요즘 무슨 라디오 프로그램을 즐겨 듣는지. 상대와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조금이라도 겹치는 지점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남들이 들으면 여전히 별것 아닌 이야기 같겠지만 관심사가 같은 우리에게는 순간 별처럼 반짝이는 것이 됩니다.
어느새 상대와 나는 세상 무엇보다 진지해지는 것이고요. 자연스레 관계도 깊어지고 친밀해집니다. 서로 떨어져 있었을 뿐이었지 실은 같은 공기를 마시며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이런 순간이 찾아오면 나와 상대는 지금까지 함께하지 못한 그간 우리의 시간을 아쉽고 애틋하게만 느끼곤 합니다.
저는 이 순간을 관계의 풀림 혹은 마음의 풀림이라 여깁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서로 찬찬히 풀어낸 것들을 다시 엮어내는 일도 시작됩니다. 한 번은 내가 날실이 되고 한 번은 상대가 씨실이 되어야 하는, 이런 어울림 끝에 결이 고운 우리가 탄생하는 것이고요.
어울리는 상대와의 시간은 마냥 편하고 즐거운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괜히 웃을 수도 있고 괜히 울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찾지 못하고 있는 의외로 간단한 해답을 내가 말해 줄 때도 있고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을 상대가 대신 복기해주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것은 더 이상 상대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거나 과시할 필요가 없다는 점입니다. 이쯤 되면 그 상대는 내가 알아달라고 하지 않아도 이미 나를 알아주는 존재가 되어 있으니까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은 길과도 닮아 있습니다. 처음 가보는 낯선 길 위에서 우리는 당황스러워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이번에는 꽤나 오래 머물렀을 때, 낯설기만 했던 그 길은 나에게 가장 친숙한 곳이 됩니다. 떠나면 그립고 그러다 다시 조우하면 마냥 반가운. 새롭게 열린 날들 가운데 우리는 또 어떤 길을 걷게 될까요? 누군가를 새로 만나게 될까요? 조금 두려운 일이고 동시에 자못 설레는 일입니다.